알피니스트

알피니즘을 빛낸 선구자들

네발의 행복 2007. 4. 18. 09:26
윌스, 알프레드 경 Wills, Sir Alfred 1828~1912
알프스 개척기에 활동한 영국의 등반가이자 고등법원 판사. 베터호른(Wetter Horn·3701m)을 등정하여 알프스 황금시대를 개막시켰으며, 알파인클럽 회원으로 1864~1865년까지 회장을 지냈다.
그의 집안은 영국 유수의 등반가문으로 유명한 등반가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1924년 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장인 노턴(E.F.Norton)은 그의 손자다.
비록 초등정이 아닌 네번째 등정이기는 하나 1854년 그의 베터호른 등정은 근대적인 등반의 시작이라 평가되고 있으며, 이 때의 등정 기록을 담은 (1856)는 알프스 등반 사상 황금기(Golden Age)의 막을 올리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영국 사람들은 베터호른의 등정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등정일인 9월 17일을 ‘근대등산 창립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윌스는 19세기 중엽에 일어난 빙하 논쟁에도 참여하여 포브스(J.D.Forbes)의 견해를 지지하였다.
윌스의 베터호른 등정 때 근대 피켈의 원조격인 용구가 최초로 등장하여 등반에 사용되었다는 점은 등산용구 발달사에서 특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
당시 윌스가 고용한 베르너 오버란트의 한 가이드가 도끼(Axe)와 지팡이(Stick)의 기능을 결합시켜 만든 수제품 아이스 액스(Ice Axe)를 들고 온 것이 현대 피켈의 효시가 된다.
이들은 이 기발한 발명품을 활용하여 빙하의 발판을 깎고, 커니스를 절단하고, 크레바스를 탐색하는 등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이 기발한 용구에 대해 윌스는 그가 펴낸 <알프스 방랑기>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 피켈의 길이는 4피트(약 1.2m)에 강철제 파이크(Pike·긴 자루창)로 얼음을 깎기 좋도록 날카로운 날을 세웠으며, 자루와 평행이 되도록 수직을 이루고 있어 마치 큰 도끼 모양을 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윌스는 알프스 계곡에 이글스네스트(The Eagles Nest)라는 산장을 지어 안내인 발마(A.Balmat·몽블랑 초등자인 자크 발마의 손자)에게 관리를 맡기고 여생을 이곳에서 보냈으며, 폐인이 된 발마를 죽을 때까지 보살펴 주었다.
저서로는 'Wandering Among the High Alps' (1856), 'The Eagle’s Nest' (1860) 등이 있다.

윔퍼, 에드워드 Whymper, Edward 1840~1911
영국의 등반가로 1865년 알프스 4000m급의 마지막 보루였던 마터호른을 5년 동안 도전한 끝에 초등정을 이룩한 일로 유명하다.
이 등반으로 베터호른에서 시작된 11년간의 황금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등산의 은시대(Silver Age)가 개막된다.
윔퍼는 원래 목판 조각공으로 1860년 판화 그리는 일을 부탁받고 알프스에 갔다가 산의 매력에 이끌린다.
그는 등반의 기초를 닦지는 않았으나 몽뺄부(Mont Pelvoux), 바르데 제끄랭(Barre des Ecuins)의 뽀엥뜨 윔퍼(Pte Whymper). 에귀유 베르뜨(Aig Verte) 등을 등반했다.
그는 바이스호른(Weisshorn), 마터호른과 같은 미답봉의 등정을 꿈꾸었으나 틴달(J.Tyndall)이 바이스호른을 초등정하자 마터호른 등정에 전념하였다.
그는 마터호른의 회른리릉, 쯔무트릉, 이탈리아릉 중의 하나를 시도하기 위해 브레일(Breuil)에 가서 까렐(J.A.Carrel)을 만났다.
그는 까렐의 인간적인 면모에 매혹되었으나 그가 이탈리아인으로 구성된 마터호른 등반대를 조직하자 분노와 배신감을 느낀 채 체르마트로 돌아와 회른리릉으로 등정하기 위한 대규모 등반대를 조직한다.
이 등반대의 대원은 프랜시스 더글러스(Francis Douglas), 찰스 허드슨(Charles Hudson), 더글러스 해도우(Douglas Hadow)였으며, 안내인으로는 미셀 끄로(Michel Croz), 피터 타우그발더(Peter Taugwalder) 부자였다.
그들은 7월 14일 오후 2시경 아무런 사고 없이 정상에 도착하였다.
이때 윔퍼는 이탈리아릉으로 올라오고 있는 까렐 일행을 보고 그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돌을 던지기도 했다.
윔퍼의 마터호른 등정은 그가 알프스를 알게 된 이후 5년 동안 8번에 걸쳐 끈질긴 도전 끝에 얻어낸 결과로 알프스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엄청난 업적이었다.
윔퍼는 정상에 서서 “세계는 나의 발아래에 있다”라고 기쁨의 함성을 보냈으니, 이 등정은 황금시대의 최후를 장식하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이로써 마터호른이 오를 수 없는 산이라는 신화는 사라졌다.
그는 이탈리아대 까렐과의 싸움에서 승리했지만, 오랫동안 기다렸던 승리 뒤에는 엄청난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산 도중 해도우가 미끄러지면서 끄로, 더글러스, 허드슨을 끌어당기자 로프가 절단되면서 네 사람은 1200m 아래의 마터호른 빙하로 추락사했다.
알프스 등반 사상 가장 충격적인 조난 사고를 일으킨 것이다.
윔퍼와 타우그발더 부자만이 살아남아 체르마트로 돌아왔다.
이 사고는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사고가 일어난 상황 자체가 독특했기 때문에 세간에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사람들은 인명사고를 내는 등산에 대하여 비난의 소리가 높았으며 등산금지 여론까지 일어났으나 등산의 열기는 한층 고조되면서 ‘은의 시대’라는 새로운 등반기를 연다.
이 사건으로 윔퍼는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판결을 받는다.
윔퍼의 등정 이틀 뒤인 7월 16일에는 장 안뚜안느 까렐(Jean Autoine Carrel)이 이탈리아 등반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릉을 통해 2등을 기록, 초등정의 영예를 놓친다.
이후 윔퍼는 알프스에서 눈을 돌려 탐험에 관심을 기울여 1867년과 1872년에 두 차례에 걸쳐 그린란드를 탐험한다.
난센의 그린란드 횡단이 1888년이었음을 볼 때 윔퍼의 생각이 한 발 앞섰음을 엿볼 수 있다.
그 뒤 윔퍼는 까렐과 함께 남미 에콰도르 안데스산군의 침보라조(Chimborazo·6310m)를 비롯하여 6개의 초등반을 기록한다.
이 등반에서 그가 펴낸 보고서를 높이 평가한 영국지리학회가 그에게 금메달을 수여한다.
그는 안데스뿐만 아니라 캐나디언 로키(Canadian Rockies)도 탐험한다.
그는 틴달의 , 존스(H.Jones)의
등 여러 책의 삽화를 그렸으며, ‘체르마트의 클럽룸(The Clubroom at Zermatt in 1864)’이라는 제호가 붙은 유명한 판화도 그렸다.
이 판화에는 당대를 풍미하던 유명한 등산가 18명이 등장한다.
윔퍼는 엄격하고 냉정하여 접근하기 어려운 인물로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죽기 5년 전인 67세에 비로소 결혼하였으나 그의 가정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그는 런던에서 태어나 1911년 샤모니에서 급사하여 몽블랑이 바라다 보이는 샤모니 계곡에 묻혔다.
그의 묘비에는 저술가·탐험가·등산가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의 생애는 바로 알프스 황금기와 더불어 시작하여 근대 등산의 기초가 굳어질 때 끝났다.
그의 역저 <알프스 등반기>는 마터호른에 오른 지 6년이 지난 1871년에 출간되었다.
등산사 연구가 아놀드 런(Arnold Lunn)이 “이 책은 사람이 산에 오르는 한 계속하여 읽힐 책”이라고 격찬을 보낸 것처럼 일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산악문학의 고전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저서로는 'Scrambles Amongst the Alps in Years 1860~1869' (1871), 'Travels Amongst the Great Andes of Equador' (1892) 등이 있으며, 국내 역서로는 <알프스 등반기>(김영도 김창원 공역·1988·평화출판사)가 있다.

 ◇ 제르바수티, 주스토


제르바수티, 주스토 Gervasutti, Giusto 1909~1946
이탈리아 프리올레 출신의 뛰어난 등반가. 트리노 대학에서 법률과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알프스 북벽 등반기로 상징되는 1930~1940년대에 서부알프스에서 5, 6급의 멋진 등반을 하였다.
1934년 샤보드(R.Chabod)와 함께 그랑드조라스(Grandes Jorasses) 끄로 스퍼(Cro Spur)에 도전하였으나 악천후로 후퇴하였다.
이들은 이를 두고두고 후회하였다.
같은 해 타쿨(Tacul) 동벽을 등반하고 1935년 6월 그랑드조라스를 다시 찾은 그는 그랑드조라스 북벽 제2등을 기록한다.
초등의 기회는 놓쳤지만 초등팀보다 6시간이나 짧은 시간에 오른 그에게 유럽 등산계는 찬사를 보냈다.
1936년 에일프로와드 서봉(Ailefroide West·3949m), 1938년 에귀유 블랑쉬드 쀼뜨리(Aig Blanche de Peutrey)의 구글리에르미나봉(Pt. Gugliermina) 남벽, 1940년 프레니(Freny)의 라이트 핸드 필라(Right Hand Pillar) 초등반 등은 특기할 만한 등반이었다.
같은 해 그는 그랑드조라스 동벽의 이롱델리지(Hirondelle Ridge)를 초등정한다.
제르바수티는 매우 현대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인물로 머메리를 존경했다.
그의 저서 <알프스에서 코카서스로>를 열심히 탐독했고, 머메리의 몬테시에라 초등반 루트를 따라 오르며 자신의 첫 선등을 장식한다.
그는 프랑스의 등반가 루시앙 드뷔(Lucian Devies)와 파트너십을 이루며 우정을 나누었다.
그와 함께 1100m가 넘는 거벽 오랑(Olan·3564m) 북벽을 우박과 안개, 벼락이 치는 가운데 올라 초등정에 성공한다.
그는 후일 자서전에서 당시의 등반 상황에 대해 “정상으로 오르는 등반은 죽음과의 사투였고, 등정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올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제르바수티는 이탈리아 산악회로부터 프랑스와 정치적 대립 문제를 이유로 루시앙 드뷔와 단절할 것을 종용받았으나 그는 “자신이 즐기기 위해 등반을 하는 것이지 국가의 위신을 걸고 등반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등반에 대한 파트너십은 국경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등반뿐만 아니라 인간미와 원숙한 인격의 소유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로프 파트너였던 루시앙 드뷔는 “비록 언어와 조국이 다를지라도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가까운 친구로 그와 함께 로프를 묶고 등반할 수 있기를 항상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알프스의 난이도 높은 거벽뿐만 아니라 첫 해외 원정으로 남미 안데스에 원정하여 세로리토리오(Cerro Littorio·5395m)와 무명봉인 마르모레호(Marmolijo·6100m) 건너편의 중앙릉도 초등정한다.
그는 1946년, 지금은 제르바수티 필라라 불리는 몽블랑 뒤 타쿨(Mont Blanc du Tacul) 중앙릉 등반 중 기상악화로 하강하다가 로프 두 가닥을 모아 쥐지 않고 한 가닥만 잡는 로프 조작의 실수로 추락사하였다.
저서로는 'Scalate Nelle Alpi' (1947)가 있다.

주르브리겐, 마티아스 Zurbriggen, Mattias 1856~1917

이탈리아 출신의 스위스 안내인. 남미 안데스의 최고봉 아콩카구아(Aconcagua·6959m) 남벽을 단독 초등반하였다.
그는 1881년부터 본격적인 가이드가 되었으며, 몬테로자(Monte Rosa·4634m)를 즐겨 올랐다.
1890년 이후 카라코람을 중심으로 한 히말라야와 뉴질랜드, 알프스, 안데스 등 알프스 이외의 지역에서 활발하게 등산 활동을 하였다.
1892년 콘웨이(M.Conway)가 이끄는 영국원정대에 참가하여 카라코룸의 파이오니어 피크(Pioneer Peak·6970m)의 서남릉을 초등정하였다.
1895년 뉴질랜드의 마운틴쿡(Mt. Cook ·3764m) 북동릉을 피츠제랄드(E.A.Fitzerald)와 함께 초등정하였다.
그는 1897년 피츠제랄드가 이끄는 대규모 안데스 원정대에 참가하여 피츠제랄드와 함께 아콩카구아 정상을 공격하던 중 정상 500m 아래에서 피츠제랄드가 고산병으로 등반을 포기하고 내려갔으나 주르브리겐 만이 단독으로 등반을 강행하여 남봉(6928m)을 초등정하였다.
저서로는 'From the Alps to Andes' (1899)가 있다.

지그몬디, 에밀 Zsigmondy, Emile 1861~1885
오스트리아의 등반가이자 외과의사. 그의 형 오토 에밀(Otto Emile)과 함께 알프스 등반 사상 황금시대를 이룬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이들 형제는 가이드리스 등반(Guideless Climbing)과 단독등반을 과감하게 실천하여 당시 주변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실천한 등반방식은 단지 한 시대를 앞서간 것으로 1920~30년대에 활약한 벨첸바흐(W.Welzenbach) 등으로 대표되는 뮌헨파에 의해 절정에 이르게 되었으며, 근대 등반의 개념을 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지그몬디는 도피네 알프스(Dauphine Alps)의 라메이쥬(La Mei Je·3987m) 남벽 횡단 중에 추락사하였다.
질러탈 알프스(Zillertal Alps)에 있는 지그몬디 슈비체(Zsigmondy Spitze)는 그들 형제를 기념하기 위해 명명된 이름이다.


 ◇ 취나드, 이본



취나드, 이본 Chouinard, Yvon 1938~
캐나다 출생의 프랑스계 미국인으로 뛰어난 클라이머이자 장비와 의류의 제작자다.
1957년 취나드는 스위스에서 이주한 존 사라테(J.Salathe)에게서 피톤 제작 기술을 전수받아 요세미티 계곡에서 자동차에 모루와 풀무, 단조용 망치를 싣고 다니며 두텁고 모양 좋은 강철제 피톤을 직접 만들어서 팔았다.
그가 만든 피톤은 여러 차례 반복하여 사용해도 형태가 변하지 않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떠돌이식 대장간은 후일 세계적인 장비 제작사가 된 ‘대태평양공작소(Great Pacific Iron Work)’로 발전한다.
그는 도끼날 모양의 우표딱지 크기 만한 러프(Rurp, Reality Ultra Real Piton)도 고안하였다.
이 용구는 1960년 요세미티의 카트피너클(Katpinnacle) 서벽 등반을 위해 특별하게 고안한 것으로 머리카락 굵기의 미세한 크랙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실용성을 인정받는다.
이 용구는 A4급의 루트를 A2급으로 다운시켜 줄 정도로 성능이 우수했다.
이밖에도 나이프 블레이드(Knife Blades), 부가부(Bugaboos), 앵글(Angle), 알루미늄 소재의 봉(Bongs), 스카이 훅(Sky Hooks) 등 여러 가지 모델들이 그의 마술사 같은 손을 거쳐 보급되었다.
그는 친환경적인 등반을 위해 너트 사용을 역설했고, 스와미 벨트(Swami Belt)를 처음으로 착용하기도 하였다.
암벽등반 장비뿐만 아니라, 1966년에는 피켈 변천사에서 가장 중대한 전환이라 할 수 있는, 피크(Pick)가 굽고 자루가 짧은 피켈과 아이스해머를 토머스 프로스트(Tomas Frost)와 함께 개발하였다.
이 용구들은 매우 혁신적인 아이디어였다.
빙벽등반에서 상반되기 마련인 스피드와 안정성을 함께 향상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또한 몸체가 하나로 고정된 현대적 감각의 리지드(Rigid) 아이젠도 최초로 고안하여 실용화한다.
이 두 용구는 빙벽등반 기술의 혁명을 가져왔다.
이 아이젠은 빙벽에서 프런트 포인팅 자세로 버티기 좋도록 기능을 높여 빙벽등반에서 최적의 조건을 제공했다.
그는 빙벽등반 용구뿐만 아니라 이런 용구를 사용해서 오버행이나 수직의 빙벽에서 몸을 끌어당겨 오르는 더블엑스 테크닉(Double Axe Technic)도 개발한다.
이 혁신적인 빙벽등반 기술의 개발로 난이도 높은 빙벽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하였다.
그가 개발한 더블엑스 기술은 1967년 캘리포니아의 여러 빙폭에서 실험을 거쳐 빙벽등반 기술의 우수성을 인정받는다.
이 기술의 개발로 빙벽등반은 대중화의 길을 걷게 되며, 훗날 프랑스에서는 이 기술을 ‘삐올레 트락시옹(Piolet Traction)’이라는 이름을 붙여 보급한다.
알프스 지역에 보급된 이 기술은 1973년 쎄키넬이 드류(Dru) 북벽 꿀르와르 초등시에 유용하게 사용한다.
1983년 미국의 <아웃사이드>지가 그를 가리켜 ‘현대판 에켄슈타인(Eckenstein)’이라고 격찬한 것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다.
에켄슈타인도 장비개혁에 공헌이 많았지만 취나드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자신이 직접 등반을 하면서 성능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의 장비에는 장인의 숨결이 살아있다.
그는 자신의 등반세계를 비즈니스로 연결시켜 크게 성공한 인물이다.
그가 장비제작으로 성공한 것은 더그 스콧(Doug Scott)의 말처럼 취나드가 지닌 천부적인 장비제작 능력 때문이라고 평가된다.
그는 현재 ‘파타고니아(Patagonia)’라는 세계적인 브랜드로 의류를 제조하여 기업가로 크게 성공하였다.
이윤이 적고 말썽 많은 금속 장비 제조를 버리고 높은 이윤의 옷장사로 돌변했다고 해서 장삿속이 뛰어난 “등산을 팔아 돈 번 기업가”로 혹평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가 개발한 등산장비는 분명 등반을 한 세기 이상 앞당기는데 공헌했다.
그는 요세미티식 등반 방식의 확산과 현대적인 빙벽등반 기술의 개발과 보급에도 기여한 바 크다.
그는 1960년대 초 한국에서 미8군의 군인으로 복무했으며, 1963년 9월 북한산 인수봉에 깨끗하고 자연스러운 선으로 연결된 취나드 A·B 두 코스를 개척하여 그의 흔적을 한국에 남겨놓았다.
그가 등산을 시작한 동기는 LA에서 송골매 훈련을 시키는 클럽회원일 때 바위 절벽에 있는 매의 둥지에 도달할 수 있을 정도의 등반기술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시작한 암벽등반이 등산가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그는 히말라야와 같이 많이 걷는 등반은 꺼려 왔다.
알프스의 악천후, 히말라야에서 셰르파들과의 신경전, 고소적응 등 거추장스러운 등반은 회피해왔다.
그는 요세미티와 같은 깨끗한 벽을 즐겨 올랐다.
그는 60여 개 이상의 험난한 코스를 등반했고, 35세에 이미 50개의 초등반을 기록했다.
1961년 부가부(Bugaboo) 지역의 하우저 타워(Howser Tower·3307m) 웨스트 버트레스(5.8 /A2)를 초등하였다.
1964년 엘캐피탄(Elcapitan)의 노스아메리카월(North America Wall)을 프로스트(F.Frost), 로빈스(R.Robbins) 등과 함께 10일에 걸쳐 초등반했으며, 1965년 엘캐피탄의 뮤어월(Muir Wall)을 8일 만에 초등반했다.
북미 등반사를 집필한 크리스토퍼 존스는 취나드의 수많은 등반 가운데 캐나디언 로키의 에디스카벨(Edith Cavell·3363m) 북벽 등반과 엘캐피탄의 뮤어월 초등을 가장 두드러진 업적으로 꼽는다.
1200m의 에디스카벨 북벽을 악천후 속에서 사전 정찰 없이 불확실한 조건 하에서 이를 극복하고 초등을 이룩하였다.
취나드는 알피니즘 세계에서 불확실성(Uncertainty)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오늘날 정보가 풍부해지면서 불확실성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등반은 모험으로 남아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1968년 남미의 피츠로이(Fits Roy) 남서벽을 초등한다.
그는 60일 동안 남극에서 불어오는 폭풍설과 맞서 싸우며 설동 생활을 하면서 등반을 성공시킨다.
이때 촬영한 기록을 이탈리아 트렌토 산악영화제에 출품하여 그랑프리를 수상하기도 했다.
1973년 엘캐피탄의 노즈(Nose) 루트 전 구간을 너트(Nut)만을 사용해 오르는 올너트(All Nut) 클라이밍을 성공시킨다.
이 등반은 클린클라이밍의 실천이기도 하다.
1980년 중국 사천성에 있는 콩가(민야콩가·7587m) 북서릉 등반 중 눈사태로 늑골 두 개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등반을 포기한다.
그는 시에라 빙벽 등산학교(Sierra Ice School)을 설립하고 아메리칸 알파인 저널에 ‘현대 요세미티 등반’이라는 글을 기고하면서 요세미티 등반기술을 널리 보급한다.
또한 그는 “등반은 쉽다.
그러나 글을 쓰기는 어렵다”면서 7년 동안의 각고 끝에 를 펴낸다.
‘Yvon Chouinard’의 발음을 우리나라에서는 ‘이본 취나드’로 쓰고 있으나, 그가 프랑스계 이민임을 감안한다면 ‘이반 슈나드’로 발음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저서로는 'Climbing Ice' (1978)가 있으며, 국내 역서로는 <아이스 클라이밍>(김영도 역·평화출판사·1986)이 있다.


 ◇ 1935년 치마오베스트 북벽 초등 당시 모습. 왼쪽에서 세 번째가 캐신.


캐신, 리카르도 Cassin, Riccardo 1909~
제2차 세계대전 전 유럽 전역의 알피니즘을 주도해 온 전전과 전후 세대를 연결한 이탈리아 등산계의 대부다.
그는 알프스 등반사에서 1930년대를 대표하는 금세기 최고의 알피니스트로 평가받고 있다.
북부 이탈리아 사볼가뇨에서 태어나 레코(Lecco)에 살면서 그리그나(Grigna)의 석회암장에서 1926년부터 등반을 시작하면서 경력을 쌓아나갔다.
그는 ‘이탈리아 신등반그룹(New Italy Climbing Group)’을 결성하고 이를 주도하면서 서부알프스와 돌로미테 등지에서 6급의 암벽등반 시대를 열어나갔다.
1934년 당대의 명 클라이머인 에밀리오 코미치(E.Comici)와 첫 만남을 가진 후 친밀한 관계를 맺어오면서 이때부터 본격적인 등반을 시작하였다.
1935년 그의 생애 최고 업적 중의 하나인 치마오베스트(Cima Ovest) 북벽을 초등하였다.
당시 그는 낙뢰와 섬광이 번쩍이는 폭풍 속에서 오버행으로 이루어진 500여m의 수직벽을 이틀 동안 비박을 하면서 과감한 등반을 감행한다.
그는 이 등반을 성공시킨 후 이탈리아의 영광이 될 만한 커다란 업적을 이룩했다는 자부심으로 감격했다.
당시 유럽 산악계의 분위기는 독일·이탈리아·오스트리아·프랑스 등의 클라이머들이 자기 조국의 영예를 걸고 경쟁적으로 미등의 벽에 초등의 흔적을 남기던, 알피니즘에도 국가간의 내셔널리즘이 강하게 작용하던 시대였다.
올림픽에 출전한 운동선수가 조국의 영예를 표방하고 그라운드에서 열띤 경쟁을 벌이면서 뛰었듯이 유럽 산악인들도 자국의 우월성을 앞세우면서 초등 경쟁을 벌였다.
1937년 피츠바딜레(Piz Badile) 북동벽 초등 당시에도 정상 부근의 폭풍설 속에 갇혀 2명의 대원이 탈진하여 사망한다.
1938년 그는 에스포지토(L.Esposito), 티죠니(Tizzoni)와 함께 단 한 번의 시도로 전 유럽의 관심사였던 그랑드조라스(Grandes Jorasses)의 워커릉(Walker Spur)을 초등반하여 유럽 산악계를 침묵시켰다.
워커스퍼 초등으로 이탈리아는 일거에 산악 강국으로 부상한다.
이 기습적인 쾌거로 이 벽의 등반을 노리던 수많은 등반가들을 실망시켰다.
캐신 일행이 이룩한 이 등반의 성공은 독일 게르만 민족의 아이거 북벽 승리에 대한 무언의 시위이기도 했으며, 알프스 3대 북벽 중 유일하게 남아있던 마지막 과제를 해결한 것이기도 하다.
캐신은 이때의 심경을 “같은 산악인으로서 아이거 북벽 초등 소식을 듣고 기뻐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한편 우리 기대가 무참히 무너졌다는 사실에 몹시 실망했다.
그래서 몇 번 정도 듣기만 했던 그랑드조라스를 선택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국가 의식이 강하게 작용한 단순한 동기에서 출발한 그랑드조라스 등반의 성공은 지금까지도 세기적인 대등반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전 전유럽의 알피니즘을 주도해 온 캐신의 천재성은 루트에 대한 정확한 판독에 있다.
세기적인 대등반으로 평가받는 워커스퍼 초등이 이를 입증한 결과다.
그는 자연스러운 선을 따르면서 직등을 추구하였다.
워커스퍼 등정 후 그는 “알피니즘의 본류는 빙설암의 어려운 조건을 추구하고 이를 극복하는데 있다”고 말했다.
등산에 입문하기 전 캐신의 취미는 권투였으나 등반 세계에 입문하고 나서부터 광적인 클라이머로 변신한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레코에서 전기공장의 감독으로 일하였으나 전쟁 중에는 레지스탕스 요원이 되어 독일 항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1946년 이탈리아산악회 레코 지부장을 역임하면서 후진 지도와 산장 복원 사업에 주력했다.
회장직을 사임한 1947년부터 하켄, 카라비너, 해머 등 금속제 장비제작에 힘을 기울였다.
1970년대 그가 직접 제작한 ‘캐신’이란 상품명의 암벽장비가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대장장이 캐신’이라는 애칭도 그가 금속장비 제작을 했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1953년 이탈리아 정부 지원의 K2 원정대 아르디토 데지오(Ardito Desio) 대장과 K2를 정찰했으나 대장과의 견해 차이로 불화가 생긴 가운데 스키 사고로 발목부상을 입어 1954년 본대(K2 초등대)에 합류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1958년 가셔브룸4봉(GasherbrumⅣ·7925m) 원정대장으로 참가, 초등정을 이룩하였다.
1961년 52세의 나이로 북미 최고봉 매킨리(Mckinley·6191m)에 원정, 사우스 버트레스 루트를 초등정했다.
이 루트는 초등자 캐신을 기리기 위해 ‘캐신리지’로 명명했다.
이 초등을 축하하기 위해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과 그론치 이탈리아 대통령이 축전을 보내 그의 공적을 크게 치하했다.
1969년에는 페루 중부의 안데스 히리상카(Jirishanca·6126m) 서벽을 초등하였다.
1974년 히말라야 3대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던 등반 고도 3500m 이르는 난공불락의 로체(Lhotse·8516m) 남벽에 대장으로 원정하였으나 베이스캠프까지 덮쳐오는 눈사태와 한 달 동안 매일 몰아치는 강풍의 횡포 앞에 결국 후퇴하고 만다.
그의 등산 인생에서 가장 괴로운 최초의 패배를 이때 처음 맛본다.
당시 대원으로 참가했던 메스너는 대장이 처음 당하는 패배감을 백전노장답게 잘 참아냈다고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로체 남벽에서 돌아와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캐신은 “아마 20년 후 누군가 이 벽을 오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20년 후에 오른다 해도 행운이 따르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고 말했다.
캐신의 예언이 있고 난 후 15년 만인 1990년에 ‘서기 2000년의 벽’은 토모 체슨(Tomo Cezen)에 의해 단독 등정된다.
그는 로체 남벽에서 후퇴했으나 그의 알피니즘은 끝나지 않는다.
1987년 78세의 나이로 피츠바딜레를 10시간에 재등하여 백전노장의 저력을 과시, 주변을 놀라게 했다.
그는 등반을 끝낸 뒤 “등반을 즐기면 50, 60, 80세까지도 등반이 가능하다”고 말하면서 아직도 자신이 건재함을 입증했다.
그는 산을 찾는 후배 산악인들에게 “보다 높은 차원의 알피니즘을 위해서는 환경 자체를 극복할 수 있는 저력을 반드시 키워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저서로는 'Lhotse 75' (1977), 'Fifty Years of Alpinism' (1981·영문판), 'Cing Uant Anni di Alpinismo' (1977) 등이 있다.

 ◇ 코미치가 인공등반 기술로 오버행을 오르고 있다.


카스파레크, 프리츠 Kasparek, Fritz 1910~1954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등반가 중의 한 사람. 그는 1938년 7월 헤크마이어(A.Heckmair), 베르크(L.Vorg), 하러(H.Harrer) 등과 함께 전 유럽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난공불락의 아이거 북벽을 초등하여 세계 산악계에 이름을 떨친다.
그는 아이거 북벽을 초등함으로써 알프스 최고 난이도의 과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알프스 철시대의 정점을 장식하는 위업을 이룩한다.
그는 카이저(Kaiser) 연봉과 돌로미테(Dolomites) 등지에서 6급의 등반을 하였다.
1938년 찐네(Zinne) 북벽을 동계 초등반했으며, 아이거북벽 등반에서는 탁월한 등반 기량을 구사하며 정상에 섰다.
1954년 안데스의 살칸타이(Salcantay·6081m) 북동릉 등반 중에 눈처마의 붕괴로 추락사하였다.
저서 'Vom Peilstein zur Eiger Nordwand' (1951)는 산악인들의 진한 우정을 담아냈으며, 하러의 <하얀 거미·Die Weisse Spinne>와 함께 전세계 산악인들에게 널리 애독된 책이다.

코미치, 에밀리오 Comici, Emilio 1901~1940
이탈리아 트리에스테(Trieste) 출신의 등반가로 인공등반을 창안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이탈리아의 ‘국민적 클라이머’로 추앙받고 있다.
돌로미테에서 등반활동을 하면서 200여 개의 루트를 개척해 6급 등반 시대의 막을 여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39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돌로미테에서 600여 개의 루트를 등반했으며, 이중 200개가 초등 루트였다.
특히 1933년 치마그란데(Cima Grande) 북벽 초등반은 알프스 북벽 등반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단독등반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디레티시마(Direttisima)를 주창하였다.
“정상에서 물방울을 떨어뜨려 그 흐르는 자국을 따라 직선으로 루트를 개척해야 한다”고 말하였으며, 가능하면 어려운 루트로 정상에 오르는 것이 가장 품위 있는 등반이라고 했다.
코미치의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 볼트의 사용으로 그 가능성이 커졌으나 그가 볼트의 사용까지 생각했었는지는 의문이다.
그가 생존했을 당시에는 아직 볼트가 개발되지 않고 있었다.
후일 그의 견해를 잘못 이해한 많은 등반가들이 세계 도처의 거벽에서 볼트를 과용하면서 직등 루트를 뚫는 우를 범하였다.
그의 충격적인 첫 번째 초등반은 1929년 이틀에 걸쳐 오른 소렐라 디 메초(Sorella di Mezzo) 북서벽 등반이다.
이 등반은 이탈리아 최초의 6급 등반으로 기록된다.
카라비너, 하켄, 줄사다리를 사용한 수준 높은 인공등반기술을 현대적 관점으로 풀이한 첫 등반이었다.
1931년 치베타(Civeta) 북서벽의 코미치 베네디티(Comici Benediti) 루트를 초등하였으며, 1933년 수직 암벽과 오버행이 550m나 이어져 있는 치마그란데(Cima Grande) 디라바레도(di Ravaredo) 북벽 코미치 디마이(Comici Demai) 루트와 치마피콜라 디라바레도(Cimapicola di Ravaredo) 북벽을 차례로 초등반하였다.
그는 후일에 치마그란데 재등을 할 때 자신의 초등 기록을 깨고 3시간 30분 만에 단독등반으로 정상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는 기도 레이(Guido Rey)의 아크로바티크 클라이밍(Acrobatic Climbing)의 맥이 흐르는 돌로미테의 분위기를 발판으로 하여 6급 클라이밍 세계로 도약하면서 현대 인공등반기술의 표준 스타일을 완성하는데 공헌하였다.
그는 오토 헤르조그(Otto Herzog), 한스 듈퍼(Hans Dulfer) 등 독일과 오스트리아 클라이머들이 주도해 온 뮌헨파 전통을 전수받은 등반가였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여러 분야의 스포츠에 열중한 만능스포츠맨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의 신체조건을 구비한 클라이머였다.
딱 벌어진 넓은 어깨, 가는 허리, 긴 팔 등은 클라이머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등산세계에 입문하기 전에는 동굴탐험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는 이탈리아 최초의 클라이밍 스쿨을 개설하여 운영했으며, 그가 학교에서 가르친 과목은 인공등반기술이었다.
그가 등반교육에서 강조한 부분은 인공보조물(피톤)을 가능하면 한 피치당 1개 정도만 사용하는 피톤의 제한적 사용법이었다.
그는 수많은 루트를 등반하였으나 피톤을 가장 적게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코미치가 발전시킨 인공등반기술은 알프스 전역의 수직벽과 오버행에서 위력을 발휘했으며, 줄사다리 3개를 이용해 루프(Roof)를 돌파하는 핵심기술도 그가 창안한 것이다.
그는 등반교육 중 여자교육생과 암각에 슬링을 걸고 내려오다 슬링이 끊어지면서 50m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저서 'Alpinismo Eroico'는 사후에 발간된 유고집이다.

 ◇ 콘웨이, 윌리엄 마틴


커닝햄, 존 Cunningham, John 1927~1980
영국의 전후 세대를 주도한 스코틀랜드의 등반가다.
원래 그는 뛰어난 레슬링 선수였으며 발레를 배우기도 했는데, 발레는 몸의 유연성을 중시하는 암벽등반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1980년 홀리헤드(Holyhead) 근처의 해벽에서 추락하는 소녀를 구하려다 사망하였다.
1953년 그는 하미스 매킨즈(Hamish Macinnes)와 함께 2명의 단촐한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조직했으나 자금조달에 실패하여 원정을 포기한다.
1958년 디스테길사르(Disteghil Sar·7885m), 1959년 아마다블람(Ama Dablam·6856m) 원정에 참가하는 등 히말라야뿐만 아니라 뉴질랜드에서도 활동하였으며, 남극을 세 차례나 방문하였다.
등반사적 측면에서 볼 때 그는 빙벽등반기술 보급에 커다란 공헌을 한 인물이다.
1960년대 수준 높은 빙벽등반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던 시기에 그는 스코틀랜드 빙벽등반의 전설적인 존재였던 지미 마셜(Jimmy Marshall)의 자리를 추월하였다.
드갈 해스톤(Dougal Haston)과 같은 우수한 알피니스트들이 마셜 밑에서 배출된 사람이다.
그는 이제까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프런트 포인팅의 한계를 70도 경사까지 끌어올렸다.
1970년 커닝햄은 케언곰(Cairngorms)에 있는 헬스럼(Hell’s Lum)의 수직빙벽을 올랐다.
이 빙벽은 길이가 짧아도 수직벽이었다.
이 등반은 스텝 커팅을 하지 않고 오른 스코틀랜드 최초의 수직 빙벽등반이었다.
그는 전 세계의 빙벽등반 기술에서 스코틀랜드 상황에 알맞은 기술을 택하여 수정을 하고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하는데 놀라울 정도의 융통성을 보였다.
그는 스코틀랜드 동계등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클라이머였다.
그는 70도 이상의 빙벽에서 아이스 스크류(Ice Screw)를 사용하지 않고 각진 아이스 대거(Ice Dagger)와 크램폰의 프런트 포인팅 기법을 사용하여 수직빙벽을 올랐다.
또한 각이 심하게 진 아이스 액스(Ice Axe)와 데드맨(Dead Man) 사용의 일반화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저서로는 'Guide to Winter Climbs : Cairngorms and Creag Mcaghaidh' (1973)가 있다.

콘웨이, 윌리엄 마틴 Conway, William Martin 1856~1937
영국의 등반가이자 탐험가로, 빅토리아 시대의 미술평론가이자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프랭크 스마이드(F.Smythe)와 같은 스타일의 등반방식을 취했으며, 머메리(A.F.Mummery)를 무척 존경했다.
윔퍼(E.Whymper)의 안데스 원정대를 모방하여 1892년 카라코룸(Karakorum) 지역에 대한 원정대를 조직하여 스리나갈(Srinagar)로부터 길기트(Gilgit)에 들어가 히스파(Hispar), 발토로(Baltoro) 빙하지역을 답사하고 지도를 제작했으며, 파이오니어 피크(Pioneer Peak·6790m)를 추르브리겐(M.Zurbriggen)과 함께 등반하여 5970m까지 도달한다.
그는 카라코룸 일대에 있는 2개의 거봉에 브로드 피크(Broad Peak·8047m)와 히든 피크(Hidden Peak·8068m)라는 산명을 붙인다.
브로드 피크는 알프스의 브라이트 호른(Breit Horn)과 비슷해서 영어와 같은 뜻인 ‘폭이 넓은 봉(Broad Peak)’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며, 히든 피크는 가셔브룸 산군의 여러 고봉에 가려져 발토로 빙하 깊숙이 거슬러 올라가야 볼 수 있기 때문에 ‘숨어있는 봉우리(Hidden Peak)’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1898년 남미의 일리마니(Illimani·6462m)를 초등정하고 아콩카구아(Aconcagua·6962m)를 등반하였으며, 1901년 자신이 처음으로 올랐던 브라이트 호른 등반을 마지막으로 등반활동을 끝낸다.
그는 1881년 뻬닌알프스(Pennine Alps) 지역의 등반안내서인 을 발간하고, 쿨리지(W.A.B.Coolidge)와 등반안내서인 라는 연작물을 발간한다.
저서로는 'Climbing and Exploration in the Karakorum Himalaya' (1894), 'The Alps from End to' (1912), 'Mountains Memories' (1920), 'The Alps' (1904), 'The Bolivian Andes' (1901) 등이 있다.

윌스, 알프레드 경 Wills, Sir Alfred 1828~Collie, John Norman 1859~1942
영국의 등반가로 초기 히말라야 개척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알프스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1893년 머메리와 함께 당디르깽(Dent du Reguin)과 에기디블랑(Aig du Plan) 남서벽을 초등반하였다.
1895년 6월 머메리, 해스팅스(G.Hastings) 등과 함께 최초로 낭가파르바트(Nangga Parbat·8125m) 원정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이 원정은 머메리와 그를 수행한 2명의 구르카(Gurkha)인의 행방불명으로 비극으로 끝났다.
콜리와 해스팅스는 10월까지 남아 머메리를 수색하였으나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이 사건은 1902년 콜리가 발표한 등정기에 친구를 설산에 묻고 돌아오는 허전한 마음을 애절한 문장으로 남겼다.
그는 1897년 캐나디언로키(Canadian Rockes)를 영국인으로서 최초로 답사한 이래 다섯 차례나 이 지역을 방문했다.
그는 유니버시티 칼리지(University College)의 유기화학 교수로 네온가스(Neon Gas)를 발견하고 X선의 응용실험을 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Climbing on the Himalaya and Other Mountain Range' (1907)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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