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피니스트

리카르도 카신

네발의 행복 2007. 3. 5. 16:12
이탈리아 산악계의 대부 “산악인은 시인과 같이 타고 나는 것”
대장장이의 기백과 시인의 감성을 겸비한 사나이
알프스의 3대북벽 그랑드 조라스 워커스퍼 초등으로 국제적 명성
알래스카 안데스 히말라야에서도 위대한 업적을 남겨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말했다. “매일 시를 쓰지 않아도 살 수 있다면 당신은 시인이 아니다.” 그의 말처럼 시인이 될 운명을 타고 나는 사람이 따로 있다면 대다수의 시인 지망생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산악인의 경우는 어떨까? 이탈리아 산악계를 대표하는 ‘살아있는 전설’ 리카르도 카신(97)은 이렇게 말했다. “산악인은 선원이나 시인처럼 태어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선원이 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은 설사 주위가 모두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자란다 해도 항구와 만나는 순간 내재되어 있던 잠재적 열정이 폭발해버리듯, 산에 오를 운명을 타고난 사람 역시 그러하다는 뜻이다.

리카르도 카신이 창립한 ‘레코 스파이더스’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산악회 중의 하나이다. 한때 이탈리아 산악회 레코지부장을 맡기도 했던 그가 만년의 안식처로 삼은 곳 역시 이탈리아 북부의 레코였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카신은 레코 출신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산이라고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사보르가뇨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개구쟁이였던 카신은 제대로 된 학교 교육이라고는 거의 받아보지 못했다. 12세 때 이미 대장간에 취직하여 풀무질을 하면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그에게 레코는 일종의 ‘항구’와도 같은 도시였다. 보다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아 친구를 따라 나선 레코에서 그만 거대한 암벽과 마주치게 되었던 것이다.

가난하지만 모험심 가득한 소년은 레코에서 일자리를 얻은 후 처음으로 맞게 되는 일요일에 그곳에서 가장 높은 레세고네 산 정상에 오른다.

“별을 보며 새벽에 떠났다. 초라한 장비, 남한테서 빌린 배낭, 좋은 옷을 버릴까 봐 몸에 걸친 낡고 해진 덧옷, 필사적으로 높은 곳을 바라보던 광기, 처음으로 정상에 섰을 때의 환희…이것이 나의 생애의 결정적인 갈림길이었다. 절대로 고칠 수 없는 산병(山病)의 시작이었다.”

이후 그는 미친 듯이 산에 오른다. 당시의 그는 크고 무거운 피톤을 직접 만들어서 썼다. 그의 유명한 애칭 ‘대장장이 카신’은 그래서 만들어졌다. 이 별명은 훗날 그가 직접 자신의 이름을 딴 등반장비업체를 설립함으로써 가장 신뢰받는 브랜드의 메인 카피가 되었다.

카신의 등반스타일은 직설적이고 과감하며 불퇴전의 결의로 특징지워진다. 그는 자연적인 등반선을 존중하되 거의 직등에 가까운 루트를 뚫는다. 일단 등반을 시작하면 제 아무리 험난한 악천후를 만나도 결코 후퇴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대단히 무모한 스타일이라고 비난받을 만도 하다. 카신의 해명은 그러나 단순하다. “내겐 시간이 없었다. 다른 이들은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같은 루트에 매달릴 수 있었지만 나는 언제나 생계를 위하여 노동을 해야 했다. 나는 내게 허락된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려 했을 뿐이다.”덕분에 북부 이탈리아 돌로미테의 1930년대는 그의 독무대였다. 1935년의 치마 오베스타 북벽 초등은 ‘세계등반사 100대 사건’에 꼽히는 대기록이다. 그는 낙뢰와 폭풍이 몰아치는 악천후 속에서 이틀 동안 비박을 감행하며 거의 500m에 이르는 오버행 절벽에 새 길을 뚫었다.

1937년의 피츠 바딜레 북동벽 초등시에는 끔찍한 사고를 겪기도 했다. 그의 기량과 체력 그리고 불퇴전의 결의를 따라갈 수 없었던 두 명의 동행자들이 결국 탈진하여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국제 산악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탈리아 촌뜨기’였을 뿐이다.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긴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1938년의 그랑드 조라스 북벽 초등기록이다. 그가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이 ‘알프스 최후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랑드 조라스에 나타났을 때 레쇼 산장의 가이드들은 코웃음을 쳤다고 한다. 유럽 최강의 산악인들이 모두 패퇴한 산에 듣도 보도 못한 ‘이탈리아 촌뜨기’들이 감히 도전장을 내밀다니 그랬을 법도 하다. 하지만 카신은 단 한번의 시도로 그랑드 조라스의 워커 스퍼를 돌파해버리고 만다. 이탈리아가 선진 산악대국의 반열에 올라서는 역사적 순간이다.

내가 카신에 대하여 감탄하는 것은 그 이후의 삶이다. 자기 분야의 정상에 오른 사람들은 대개 명예의 전당에 자리를 잡고 앉아 보신(保身)과 수성(守成)에 골몰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자리를 박차고 등반의 최전선으로 달려나갔다. 카신은 1956년 가셔브룸4봉 원정대를 이끌고 나아가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1961년 알래스카 최고봉 매킨리의 미등루트였던 사우스 버트레스에 도전했을 때 그의 나이가 52세였다. 이곳은 현재 그의 이름을 따서 ‘카신릿지’라고 명명되어 있다. 65세가 되던 해인 1974년에 그가 도전했던 산이 최근에 엄홍길이 또다시 패퇴한 로체 남벽이다. 카신의 로체 남벽 원정대는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그의 생애 최초의 패배였다. 하지만 65세에 로체 남벽에 도전했다는 것 자체가 존경 받아 마땅할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987년에는 피츠 바딜레 초등 5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카신은 당시 78세의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50년 전에 자신이 뚫었던 루트를 10시간 만에 다시 올라 세인을 놀라게 하였다. 그를 이토록 강한 사나이로 만든 힘의 원천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카신은 ‘산과의 대화’라고 답한다. 산은 모든 루트에서 자신에게 ‘여지껏 몰랐던 새로운 언어’를 가르쳐 주었고, 자신은 산과의 대화를 통하여 ‘감각적 커뮤니케이션’을 익혔다고 고백한다. “산은 우리의 정신을 풍요롭게 해주는 강력한 원천이다. 그런 뜻에서 산과 나의 대화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 65세?? 로체 남벽 첫 패퇴 후 회고록 써

리카르도 카신은 평생 30건에 달하는 대암벽 세계 초등 기록을 세웠다. 이쯤 되면 엄청난 저서를 남겼을 법도 한데 그는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아마도 글보다는 행동을 앞세우는 그의 기질에서 연유한 것일 수도 있고, 거의 무학(無學)에 가까운 학력 때문에 빚어진 현상일 수도 있다. 이런 그의 태도에 커다란 변화를 가지고 온 것이 바로 1974년 로체 남벽 원정대의 패퇴였다. 그는 생애 최초의 패배를 맛본 이후 오랫동안 침잠해 있다가 자신의 등반 인생을 찬찬히 되짚어보는 회고록을 한 권 썼다. 바로 노인의 지혜가 그윽한 빛을 발하는 ‘나의 등반 50년’(1981)이다.

그의 별명은 널리 알려진 대로 ‘대장장이 카신’이다. 그가 대장장이 출신이며 장비제조업체를 설립했다는 것 외에도 우직하고 투박한 그의 인상에서 연유한 바 큰 별명이다. 하지만 ‘나의 등반 50년’을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이며 예술가적 직관을 가지고 있는가를 확인하게 되어 혀를 내두르게 된다. “나는 산악인을 선원과 시인에 비유했다. 나 자신은 책벌레가 아니며 시도 읽은 적이 별로 없다. 하지만 나는 시인이 잿빛 어린 일상에서 강렬한 상상력이 창조하는 세계로 탈출하려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시에 대한 공감 없이는 산악인이 산과 대결하거나 선원이 바다와 대결할 수 없다.”

암벽등반을 하는 산악인은 절벽의 시인이다. 카신이 토레 트리에스테 동남릉을 오르고 돌아오자 그에게 악수를 청한 어떤 산악인이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 700m의 암벽 위에 당신은 시를 남겼소.” 대장장이는 육체적인 인간이다. 시인은 정신적인 혹은 예술적인 인간이다. 리카르도 카신은 이 두 존재를 한 몸에 구현한 인간이다. “극도의 난관에 도전하는 것은 건강한 희열과 정신적 고양을 추구하는 일이다. 이 희열과 고양은 등반의 성공 혹은 실패와 무관하며, 오직 위험한 싸움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한국일보 2006년 5월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