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피니스트

월터보나티(1930 ~ )

네발의 행복 2006. 8. 10. 11:19



월터 보나티(Walter Bonatti, 1930~    )

 

아마도 2차 세계대전 후세대 중에서 가장 뛰어난 알피니스트인 월터 보나티는 드류 남서필라 단독등정(1955년), 마터호른 북벽 동계단독등반(1965년), 그리고 알프스와 안데스, 히말라야 등에서의 수많은 등정 등과 같은 그런 대담한 등반으로 극한 알피니즘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비록 체력과 뛰어난 등반기술로 유명한 보나티지만, 그는 등반철학을 발전시킴으로써 알피니즘의 전통에 가장 중요한 공헌을 한 셈이다.

그는 등산을 산봉우리들의 정복으로서만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정복으로 보았다.  그에게 극한 알피니즘은 자기인식에 이르는 길이었으며, 자연과의 접촉을 통한 성장과 부활의 수단이었고, 과도하게 복잡해지고 편리해지는 사회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옳은 길을 가게하는 이정표였다.

1930년 6월 22일 이태리 베르가모에서 태어난 보나티는 이태리 북부의 그리그나의 여러 피나클에서 19세에 등반을 시작했다.  그는 아주 급속도로 성장하여 곧 그의 시야를, 특히 그랑드 죠라스의 워커능 같은 알프스의 가장 어려운 몇몇 루트들에 돌렸다.

이 호된 등반을 준비하면서 그는 아다멜로라 불린 봉우리를 등반했으며, 크로즈 델 알티시모 남서벽의 직선루트를 제 2등했고, 스위스 남부의 브래가그리아 산군을 여행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강루트를 익혀두기 위해 그랑드 죠라스의 일반루트를 등반했다.  그리고는 그의 목표를 향해 출발했다.

그는 첫 번째 시도에서 실패했는데, 그 때 그의 파트너 카밀로 바자그히가 후퇴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실망스러웠지만 여전히 결의에 찬 그는 다시 시도하기 위해 안드레아 오지오니와 에밀리오 빌라와 팀을 이루었다.  그들은 먼저 아이귈래 데 퓨우터래 서벽 직등루트를 등반한 후, 워커능을 마무리짓기 위해 되돌아왔다.  극한 알피니즘에서 이러한 세례행위를 마친 그는 알프스에서 가장 거친 루트들을 시도할 준비가 되었다.

가파르고 등반되지 않은 벽들이 보나티에게 강력한 매력을 발산했는데, 그랜드 카푸친 동벽을 처음 본 그는 거기에 등반루트를 내기로 다짐했다.  그 지역에 몰아친 알프스의 예상치 못할 기후 뿐만이 아닌 많은 어려움들이 그 벽에 존재해 있었다.  폭풍 때문에 두 번이나 실패한 그는 마침내 1951년 7월에 루시아노 지고와 함께 세 번째 시도에서 성공했다.

비록 평원에서 자랐지만, 보나티는 거기서의 그의 삶에서 차츰 깨어나게 되었으며 1953년에는 산에서의 삶을 위해 그리고 등산에 전념하기 위해 회계원으로서의 안정된 직업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그 다음해에 그는 알파인 자격증을 획득한 후, 가이드 생활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의 인생에서 한 전환점은 그가 1954년 이태리 K2원정에 선발되었을 때였다.  23세의 그는 가장 어린 대원이었다.  그러나 그 원정대 대장 알디토 데시오에 의해 강요된, 그의 개인적인 기질과는 맞지 않는, 엄격한 훈련과 규율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해 그 원정의 성공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곤란에 맞서서 그는 정상캠프 근처까지 산소통을 여러 개 옮겨놓았다.  이러한 업적이 아칠레 콤파그노니와 리노 라셀델리가 아브르찌 능을 통해 정상에 도달하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지만, 보나티와 그의 훈자인 동료 마흐디는 하마터면 목숨을 내걸뻔 했다.

앞서간 대원들의 텐트를 찾을 수 없었던 그들은 천막이나 침낭 하나 없이 2,5000피트 지점에서 밤을 지새야 했다.  등반역사상 가장 끔찍한 비박들 중 하나에서 그들은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들은 몽롱해져 오는 추위와 휘몰아치는 돌풍을 견딘 후, 그 비박지점에 산소통를 남겨놓고서 다음날 힘겹게 내려왔다.  그 비박과 K2에 관한 이야기는 그가 저술한 'K2에서의 시련 (1985)'에 잘 묘사되어 있다.  

비록 K2에서 두드러진 활약은 했지만, 산소통을 정상캠프까지 옮겨놓지 못한 것으로 인해 보나티는 그 원정의 성공을 위협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고소캠프가 합당한 위치에 세워지지 않았으며, 정상대원들이 쉽게 가져갈 수 있는 범위 내에 산소를 올려놓은 것만으로도 엄청난 업적이라 지적하면서 그러한 비난에 즉각 반박했다.

여전히 그러한 비난이 그를 괴롭혔으며 한동안 그에게서 등반의 즐거움을 빼앗아갔다.  그래서 그는 드류 남서필라를 단독으로 시도하여 등산에 대한 그의 열정을 새롭게 찾으려 했다.  그는 등산에 대한 그의 뜨거운 흥미를 회복하고 자신에 대한 확신을 되찾기 위해 마침내 1955년에 그 등반을 실행했다.

대규모 원정성격의 등반을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1958년 리카르도 캐신의 가셔브롬Ⅳ봉 원정의 초대에 응했다.  두 번의 헛된 정상시도 후, 보나티와 칼로 마우리는 마침내 북동능을 경유하여 정상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또다른 초등반들이 알프스와 남아메리카에서 이루어졌지만, 모든 그의 등반들이 승리로 끝난 것만은 아니었다.  1961년, 몽블랑의 프레네 중앙능에서 그와 여러 동료들은 번개치는 폭풍에 갇히게 되었다.  하산 중 안드레아 오지오니와 다섯 명의 동료 등반가들은 피로와 폭풍에 의한 극심한 노출에 의해 한 명씩 죽어갔으며 보나티와 피에레 마죠만이 간신히 살아남았다.  

비록 그는 다른 등반가들을 돕기 위해 가능한한 모든 노력을 다했지만, 몇몇 언론인들은 그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좀 더 노력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사실 보나티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그들 모두 사라졌을 것이다.  불란서 정부가 극적인 상황하에서 용기와 결속력(우정)을 보여준데 대한 보답으로 가장 공식적인 인정을 그에게 부여해준 레지온 디혼너 상을 수여하여 그 진상이 바로잡혔다.

프레네 중앙 필라에서의 비극에 따른 잡음이 가라앉은 후, 보나티는 극한 알피니즘에서 은퇴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어려운 등반을 해내기로 했다.  마터호른 초등 100주년에 맞춰 1965년에 그는 북벽에서 대담한 단독동계등반을 행하여 그의 능력을 과시했다.  그러한 놀라운 업적 후, 34세에 그는 또다른 모험적인 분야를 위해 극한등반을 단념했다.

그 후 보나티는 지구상에서 가장 야생적이고 가장 외진 곳들에서 모험을 추구하면서 지구를 여행했다.  그는 그러한 여행에 대해 글을 쓰고 강연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며, 여행하지 않을 땐 이태리 영화배우였던 로사나 포베스타와 함께 이태리 밀란에서 생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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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등산은…….  무엇보다도 투쟁과 극기, 이상적이고도 웅장한 산들에 둘러싸인 정신적인 안정과 즐거움이 동반되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산봉우리들의 등정에 항상 뒤따르는 시련과 고난, 그리고 궁핍은 등산가가 그의 힘과 개성을 길들이기 위해 받아들이는 타당한 시험이 된다.  

험난한 시련을 겪으면서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밀접하게 관련된, 그리고 산에서의 수천의 위험스런 상황에 처한, 알피니스트는 그의 장점과 단점 모든 면에서 자신만의 색깔로 자기자신과 다른 이들 앞에 무자비하게 벗겨져 가로놓이게 된다.  내 견해로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산들이, 등반가에 대해 가장 아름답고도 즐거운 감정과 진보의 뿌리인, 어떤 특성들의 완성에 기여하는 최상의 시련의 근원이 될 수 있음을 어느 누구에게나 확신시키기에 충분해야 한다.        

                                            월터 보나티(Walter Bonatti)

                                                     -On the he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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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후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후반까지는 알프스의 북벽에서 단독 등반과 동계 등반이라는 마지막 게임이 시도되었으며, 그 주역을 떠맡은 주인공은 월터 보나티(Walter Bonatti)와 토니 히벨러(Tony Hiebeler)였다.

1955년 두류(Dru)의 서남 필라(Pillar․일명 보나티 필라)가 5일만에 월터 보나티에 의해 단독 초등된다. 이 등반에서 보나티는 단 한 개의 볼트도 사용하지 않은 채 등반을 성공해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그는 1주일 분량의 식량과 장비(80개의 피톤과 로프 3동)을 큰 자루에 담아 끌어 올렸다. 이렇게 홀링 색(Hauling Sack)을 이용하는 방법은 후일 요세미테의 거벽이나 세계 오지에 있는 빅월 등반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적인 장비 운반기술이 된다. 이 방법은 요세미테 등반 기술보다 10년이나 앞서 보나티가 개발한 기술이다.

그는 ‘새로운 세대의 산악인이란 사전에서 불가능이란 단어를 지워버릴 수 있도록 등반기량을 연마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슈퍼 클라이머 세계의 길을 걷는다. 보나티는 1950․60년대를 대표하는 뛰어난 알피니스트로 <나의 산으로․Lamesmontagne>와 <위대한 날들․Tee Great Days>이라는 모험 기록을 남겼으며, 장비제작에도 참여하고 있다.
++++++++++++++++++++++++++++++++++++++++++++++++++++++  자료출처:한국산악회